수백년간 무림은 정파（正派）와 사파（私派）로 나뉘어저 있으면서 힘의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 균형은 금방이라도 깨질것처럼 위태로웠다.

정파와 사파는 서로를 욕하고 멸시하면서 보이지 않는 앙금을 점점 벌여가면서,극도로 악감정을 쌓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국,사냥중 길을잃고 정파의 영역에 들어간 사파인이 살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정사전쟁'이 발발하게된다.



수백년동안 차올라있던 악감정이라는 물은,전쟁이라는 구멍이 생기자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그 거센 물살은 정사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파는 사천왕（四天王）이라는 네 초고수를,정파는 정파오제（正派五帝）라는 다섯 초고수를 필두로 오래도록 싸웠고

2년동안 전쟁은 팽팽한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사파의 사천왕중 한명인 악하시아（惡昰時牙） 이재용이

정파오제의 검제（劍帝） 명경천왕（明鏡天王） 건희에게 패해 죽음으로서 전세가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사파최강의 4인중 한명의 죽음은,전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파에 큰 타격을 주었고

결국 정사전쟁이 발발한지 3년만에,사파 최대의 문파 자개문（慈開門）이 멸문당하므로서 전쟁은 정파의 승리로 끝났다.





한편 전쟁으로 정파오제중 최강이라는 입지를 굳힌 검제,명경천왕 건희는 무림최강이라는 뜻의 황（皇）의 칭호가 붙어

검황（劍皇）으로 칭해졌고,사파의 남은 세명의 사천왕은 왕（王）보다 한단계 낮은 칭호인 존（尊）의 칭호가 붙어

사파삼존（私派三尊）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무림은 정파가 지배하게 되었다.사실상 정파통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였지만 정파인들은 여전히 사파인들을 무시하였고,사파인들 역시 자신들이 정파인이라고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므로,사파의 세력과 입지가 크게 줄어들기는 했어도 사파가 없어진것은 아니었고,정사간의 앙금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힘의 균형은 유지될수가 없었다. 전쟁의 패배로 인해 줄어든 사파의 세력과,전쟁의 승리로 늘어난 정파의 세력간에 힘의 차이가 워낙 컸기때문에,사파는 정파에게 무시당하고,멸시당하고,부당한요구를 받고,심지어 문파원이 살해당하는 사태가 일어나도 참을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사전쟁이 끝나고 7년후-

사파,봉래문 -





"그럼 올해 말까지 부탁드린 사람과 물품을 보내주십시오"



콧수염을 옆으로 기른 뚱뚱한 남자가 그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예..."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머리가 거의 하얀 중년의 남자.

대답은 하지만 그의 표정은 심히 어둡다.



"에헴,그럼 이만"



뚱뚱한 남자는 대답을 듣고 헛기침을 하며 일어났다.그러자 중년의 남자가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했다.



"살펴가십시오"



누가보아도 나이가 많아보이는 사람이 젊은사람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모습은,처음보는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하기에 충분한 모습이지만,이 문파 사람들에게는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었다.

사파의 약소문파 봉래문（鳳徠門）은 정파명문 대무문（大懋門）과 접경하고있어,해마다 대무문이 봉래문을 보호해준다는 명목 아래청년 열명,처녀 열명및 봉래산（鳳徠山） 금（金）광에서 나는 금의 30%를 대무문에 공물로 바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어째서 우리는 저런 녀석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만 해야하는 겁니까?"



중년의 남자 옆에 앉아있던 소년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한다.십오세 남짓한 아직 앳된 소년.

맑은 검은색 눈동자,온화한 눈매와 오똑선 코,그리고 작은 입술의 잘생긴 소년.머리는 묶어서 뒤로넘기고,탕건을 둘러 고정했으며 검은색 비단에 금으로 수놓인 도복을 입고있었다. 한눈에 귀족의 자제라는사실을 알수있게끔 해주는 고급스러운 옷과 깨끗한 용모의 이 소년은,봉래문의 소문주 강원진이다.그가 아버지라고 부른 중년의 남자는 다름아닌 봉래문의 문주,강득호.

강득호는 슬픈 눈길로 자신의 아들 원진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답한다.



"아마도..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이겠지.."



원진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아버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고 목구멍까지올라온 말을 삼키고,투덜거리며 방을 나왔다.



"제길.."



'탁'



원진은 애꿎은 마당의 조약돌을 걷어차며 이마에 주름살을 만들었다.



사실 정파대전이 끝난 현재,'지켜준다' 라는것은 당치도 않는 구실이었다.하지만 거절하면 너희 문파를 멸문시키겠다.라는 협박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봉래문주 강득호가 모를리 없었다.더럽지만 어쩔수가 없었다.힘이 없기때문에.

사실 봉래문만 이런것이 아니라,사파의 문파들중 사파삼존이 이끄는 세 문파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파의 문파는 봉래문과 같은 실정이었다.



"하-아..."



원진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한숨쉬었다.



힘이없는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전쟁에 진 전세대의 사파인들이 원망스럽다면 원망스러울 뿐.

아버지 강득호는 젊었던시절 무영검（無影劍） 강득호라 불리며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고수였다.

그 자질을 인정받아 사천왕 이재용의 제자로 들어가,정사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오른팔로서 크게 활약했지만

이재용이 검제 건희에게 패해 죽음으로서 그의 장래도 함께 날아가버렸다.



전쟁이 끝나고,주변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이재용이 이끌던 자개문의 사람들을 긁어모아 봉래문이라는 작은문파를 세웠지만,이미 젊은 혈기를 정사전쟁에서 모두 소비해버렸기 때문인지,무영검이라 불리던 시절의 강득호의 패기는 사라져 있었다.겨우 문파가 운영될 정도의 업무만 보면서,나머지 시간은 모두 술과 함께 보냈던 것이다.



유년기시절,아버지의 뒤를보고 자랐던 원진에게 아버지의 실의는 큰 충격이었다.어렸고,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해주었기때문에 전쟁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아버지가 의욕을 잃었다는 사실만큼은 원진의 가슴깊숙히 들어와 박혔고,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은 곧 의욕상실로 이어졌다.











"슬슬..가볼까..."



원진이 검은색 도복을 바로잡으며 대문을 나섰다.그가 가는곳은 봉래문의 검술을 가르치는 검술도장, 봉래검관（鳳徠劍館）이다.

아버지의 실의에서 이어진 의욕상실로 인해,무림의 고수가되고싶다는 꿈은 철이 들무렵에 이미 사라져 있었지만,

이 봉래검관만큼은 5년동안 꾸준히 다니고 있었다.







"요!"



'휘익'



원진과 비슷한 또래의 어떤 소녀가 갑자기 나타나 원진에게 목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원진은 예상하고 있었다는듯 가볍게 그것을 피했다.



"오?"



그녀가 의외라는듯 감탄하자,원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그런거에 당할수준은 한참 넘었다고"

"그러셔요?소문주님~"

"아아,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원진과 같은나이인 이 소녀의 이름은 안유린.봉래검관 관장 안희찬의 딸이다.

작은 코와 입,큰 눈망울과 부드럽게 내려간 눈썰미.

머리를 항상올려 묶고 다녀서 약간 남자같은 인상을 주지만

머리를 풀어 내리면 상당한 미인이다.



원진이 봉래검관을 계속해서 다니는 이유는 바로 유린때문.

어릴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원진은 유린을 좋아하게되었고,봉래검관 관장의 딸이라는사실을 알게된 후꾸준히 그곳을 다니고있는 것이다.

마침 봉래검관 관장 희찬과 문주 득호도 친분이 있는 관계여서,원진이 유린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득호와 희찬은 말없이 둘을 약혼자로 점찍었다.



원진도,유린도 사람들이 둘을 약혼한 관계로 본다는 사실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였고

둘은 자연스럽게 '약혼관계'가 되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
"서방님,이라고 불러."



원진이 익살어린 표정으로 말하자,유린의 얼굴이 붉어진다.



"바보"



'퍽'



유린의 목검이 원진의 배를 후려쳤다.



"컥...야..."



원진이 신음하며 유린을 힘겹게 올려보자,유린은 때려놓고 또 미안한지 원진의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린다.



"아..가...가자.아버지가 기다리시겠어"

"잠깐..."

"빨리~"



원진은 유린에게 손을 잡힌채 끌려가듯이 유린을 따라갔다.

푸른비단에 박힌 보석처럼 밝게 빛나는 태양 아래로, 한쌍 제비가 지저귀며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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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질렀다 무협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