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불타는 모루

토비의 비명이 홀 전체에 울려퍼졌다. 손님들은 일제히 레이나와 토비 쪽을 바라보았고 잠깐동안 정적이 흘렀다. 토비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여관 주인이 그들의 테이블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여관 주인이 다소 작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레이나와 토비는 서로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레이나는 울먹거리며 여관 주인을 바라보았다.

"저... 정말 죄송한데. 여기 오기 전에 돈이 없어졌어요. 지갑이...“

레이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실직고했다. 그러자 방금까지도 미소를 띠던 주인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상궂게 변했다.

"이 망할 꼬맹이들이 어디서 개수작이야! 돈이 없으면 썩 꺼져!“

그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고함을 질렀다. 주변에서는 손님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해요. 저희가 사고로 돈을 잃어버렸는데 먹는 도중에 알았어요. 저희가 먹은 만큼 일이라도 도울게요.“

토비가 일어나서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러나 주인장의 화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누가 너희 도움 따위 필요하대? 당장 돈을 내던가, 경비대에 끌려가던가!"

주인장은 고성을 질러대고 레이나와 토비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웃지 못할 소동이 계속되자 주방에서 나와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슨 일이데 이렇게 시끄러워?“

그는 드워프치고는 꽤나 덩치가 컸으며 새까만 수염을 정갈하게 묶고 머리엔 두건을 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기저기 흉터투성이에 험악해 보였고, 그는 자기의 큰 팔뚝만큼이나 커다란 식칼을 손에 쥐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짜증이 잔뜩 난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톰! 이 녀석들이 글쎄 겁도 없이 돈도 안 가지고 와서 밥을 먹었다니까?“

주인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는 레이나와 토비를 가리키며 역정을 내었다. 그 말을 들은 톰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리고 위압적인 표정으로 죄인 2명과 테이블을 번갈아 훑어보았다. 레이나와 토비는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의자에서 일어나 있고 반쯤 먹은 음식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모험가인가?“

 톰은 낮고 위협적인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레이나가 황급히 대답했다.

"네, 정말 죄송해요. 저희가 어떻게든-“

"음식부터 마저 먹게.“

"네?“

톰의 의외의 대답에 레이나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놀란 것은 레이나와 토비뿐만이 아니라, 여관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토머스!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이 녀석들은 무전취식을 하고 있다고!"

여관 주인은 신경질적으로 톰에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톰은 고개를 돌려 여관 주인을 쳐다보았다. 불빛을 등진 그의 그림자 진 얼굴에서 위압감이 느껴지자 여관 주인은 아차 싶은 얼굴로 허둥대기 시작했다.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아직 밥도 다 못 먹지 않았나? 배고픈 사람은 돌려보내지 말라고 했네. 식사를 마치면 내 잔업이라도 시키지.“

톰이 낮고 거친 목소리로 여관 주인에게 말했다. 여관 주인은 못마땅하지만, 그의 단호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네!"

톰이 토비를 가리키며 별안간 목소리를 높였다. 토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이 무언가 또 잘못했다는 생각에 침을 꿀꺽 삼키고 긴장했다. 톰의 위압적인 얼굴이 토비 앞으로 훅 다가왔다.

"드워프 전통 빵은 스튜나 소스에 충분히 적셔서 부드럽게 먹도록. 무식하게 그냥 씹어먹지 말고.“

험상궂은 외모와 거친 말투와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토비는 고장이 난 듯 멍한 표정이 되었다. 톰은 그 말을 끝으로 주방으로 돌아갔다. 여관 주인은 여전히 꿍한 표정이었지만 주변 손님들도 '꼬맹이들인데 한 번 용서해줘라.', '착해 보이는 애들인데 너무했다.'라며 톰에게 동조하자 결국 그는 궁시렁대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레이나와 토비는 그제야 자리에 앉아 불편한 마음을 안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토비는 안내해주던 그 꼬마 녀석이 소매치기한 게 틀림없다며 분개했다. 레이나 또한 낯선 곳에서 자신의 신분을 증빙해줄 소개장이 함께 없어진 탓에 근심이 가득했다. 여러모로 편치 않은 식사를 마친 둘은 빈 접시를 들고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는 톰이 커다란 팬을 화구에 이리저리 돌리며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화구의 불길이 넘실대면서 톰의 얼굴을 비추자 그의 얼굴이 더욱 험상궂게 보였다. 레이나와 토비가 빈 접시를 들고 쭈뼛쭈뼛 들어오자 톰은 턱으로 개수대를 가리켰다. 적응되지 않는 험악한 톰의 외모에 바짝 긴장한 둘은 황급히 제법 설거짓거리들이 쌓인 개수대 쪽을 바라봤다. 요리를 마친 톰이 그들에게 다가와 쉰 듯한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밥들은 맛있게 먹었나?"

이번에도 거친 목소리와는 정반대의 말이 나왔다. 토비와 레이나는 꾸벅 인사하며 톰이 베풀어준 아량에 감사를 표했다. 그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감사를 받았다. 그리고 개수대에 쌓인 설거짓거리들을 가리켰다.

"드워프 사전에 공짜란 없지. 이제 밥값을 하도록!"

그는 큰 목소리로 호통치고는 감독관처럼 팔짱을 끼고 험악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레이나와 토비는 팔을 걷어붙이고 개수대 앞에 섰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 보며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개수대에 물이 채워지자 레이나는 손을 물에 가져가 주문을 조곤조곤 읊조렸다. 그러자 채워진 물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동그란 구의 형태로 소용돌이쳤다. 토비는 빠른 손놀림으로 거품을 내어 그릇 구석구석을 닦고 소용돌이치는 물속으로 한 접시 한 접시 넣었다. 레이나는 물을 제어하며 거품과 음식물 찌꺼기들을 말끔히 닦아냈다. 완전히 닦아낸 접시들은 퐁 하는 소리를 내며 소용돌이 밖으로 튀어나왔고 튀어나오는 족족 토비는 접시를 낚아채 마른 수건으로 닦아 건조대 위에 올려놓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가 불과 몇 분 만에 끝났고 그들은 서로의 손뼉을 쳤다. 이런 그들 뒤에서 입이 떡 벌어진 채 지켜보는 톰의 모습이 과연 압권이었다.

"애송이들인 줄 알았는데 대단하군그래. 자네들 정체가 뭐야?“

톰은 두 눈을 부릅뜨며 거친 말투로 말했다. 토비는 간신히 '칭찬하실 땐, 적어도 안 무서운 표정을 지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대답했다.

"사실 저희도 고향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나 운영하고 있었어요. 여기 이 친구는 요리사예요.“

토비가 레이나를 가리키며 말을 마치자 톰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덥수룩한 수염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레이나를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그럼 자네를 한 번 시험해봐도 되겠나?"

톰이 레이나를 향해 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레이나는 그의 말의 의도를 잘 파악할 수 없어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거지 한 번으로 밥값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일세. 오늘 밤에 큰 연합 상단에서 단체 손님이 오기로 했네. 꽤나 규모 있는 상단이라 일손이 부족해. 자네가 나를 도와 오늘 솜씨를 좀 발휘해볼 텐가?“

톰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분명 제안의 말을 건네는 톰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 부담스러우리만치 레이나에게 가까웠다.

"오늘 정말 멋진 드워프 전통 요리를 대접받았으니 저도 무언가 보답하고 싶어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나는 자신감 있는 말투로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레이나의 말을 듣고 톰은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통하게 말했다.

"좋아! 시원시원하구먼그래. 맘에 들어!“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군.’

토비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작은 소리로 혼잣말했다. 그러자 웃고 있던 톰의 얼굴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오며 토비에게 향했다.

"뭐라고?“

"아앗!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서빙을 돕겠습니닷!“

토비는 도망치듯이 후다닥 주방을 빠져나갔다. 레이나는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고 톰의 표정도 왠지 조금 더 온화해진 것 같았다.

톰은 무언가 휘갈겨 쓴 양피지를 레이나에게 보여주었다. 지독한 악필이었지만 레이나는 톰이 구상한 오늘의 메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톰은 쉰 목소리로 그의 메뉴를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리는 총 3가지일세. 첫 요리는 용암 감자일세. 난쟁이감자를 허브와 함께 오븐에 구워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만드는 게 핵심이지. 두 번째 요리는 헤비엑스 스테이크일세. 두꺼운 산양 고기를 화덕에 바싹 구워 내부는 육즙이 가득하게끔 만들면 되네. 세 번째는 불타는 모루 특제 햄일세. 숙성해놓은 햄을 구워 짙은 흑맥주 소스와 함께 제공하지. 어떤가?“

"우와! 대단해요! 드워프 전통 요리의 특색이 느껴지는 요리들이에요! 전부 신경써서 잘 짜신 것 같아요!“

레이나는 감탄하면서 말했다. 그녀가 오늘 맛봤던 요리들로 미루어보아 톰은 분명 실력있는 요리사였기 때문에 그가 구상해놓은 요리만 봐도 훌륭할 것이 분명했다.

"자네 생각엔 이대로 가도 괜찮겠나?“

"혹시 오늘 오시는 상단 분들은 드워프 상단이실까요?“

레이나가 잠시 생각하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닐세. 연합 상단이라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있을 걸세.“

 "분명 이곳에 오는 상단들은 드워프 전통 요리를 맛보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메뉴들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다만 드워프 요리가 고기 위주로 푸짐하게 제공되다 보니 드워프가 아니신 분들은 조금 무겁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메뉴에 산미가 있는 요리들을 추가하고 용암 감자에는 달콤한 치즈 소스를 함께 제공해서 디저트의 느낌도 내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드워프 전통 요리를 먹고 싶은 손님들도, 산뜻한 요리를 먹고 싶은 손님들도 모두 만족하실 것 같아요.“

"과연 일리가 있군.“

톰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낸 레이나를 보며 속으로 짐짓 감탄했다.

"그럼 자네가 추가 메뉴를 맡아 줄 수 있겠나?“

"맡겨 주세요!“

레이나는 머리를 묶으며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잠시 후, 불타는 모루 안으로 상단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관 주인은 상단의 대표로 보이는 하플링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오, 더글린. 정말 오랜만이구먼. 잘 다녀왔는가?“

"말도 말게, 그림즈비. 긴 여정이었어. 다들 배고파하니 잘 부탁하네.“

상단의 대표는 조금은 꼬장꼬장한 말투로 말했다. 그의 말에 여관 주인은 비위를 맞추며 답했다.

"여부가 있겠나. 자, 자리에들 앉게.“

얼마 지나지 않아 불타는 모루는 상단 사람들로 가득 찼다. 토비와 여관 주인은 레이나와 토비가 전달해준 메뉴를 손님들에게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고 손님들은 고심하며 메뉴를 골랐다.

레이나는 머리를 질끈 고쳐 묶고 앞치마를 동여맸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그녀가 오늘 준비한 요리는 톰의 햄과 산양 치즈를 곁들인 '시트러스 허브 샐러드'와 달콤한 베리를 와인과 함께 졸여 만든 '베리 그릴드 치킨'이었다. 그녀는 빠른 손놀림으로 샐러드의 재료를 손질하고 이따금씩 손에서 조그만 불꽃을 만들어 닭고기에 불맛을 더했다. 톰도 그에 뒤질세라 능숙하게 스테이크를 구워냈다.

"그림즈비, 그쪽이 아니라 이쪽 테이블이잖아요!“

밖에서는 오히려 여관 주인을 나무라고 있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 여관 주인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이 지금-“

"불평할 시간 있으면 3번 테이블 빈 접시부터 정리하세요!“

여관 주인은 속절없이 토비의 페이스에 말려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말에 따랐다. 토비는 손님들에게 차분히 음식에 대하여 설명하고 어울리는 술을 추천해주면서도 작은 요청도 놓치지 않았다.

그날, 불타는 모루의 밤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손님들은 음식의 수준에 감탄했고 주방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빈 접시뿐이었다. 상단의 대표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오늘이 역대 최고였다고 여러 번 반복해서 칭찬했다. 상단의 일원들도 저마다 톰의 묵직하면서도 풍미 있는 고기 요리와 레이나의 새콤달콤하고 섬세한 요리가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며 나가면서 다음번 방문을 기약했다. 토비의 매끄러운 서빙과 친절한 설명은 오늘 밤을 한층 더 빛냈다.

"어. 음.. 그래..  덕분에 잘 마쳤네.“

모든 정리를 마치고 여관 주인이 마지못해 레이나와 토비를 칭찬했다.

"잘 마친 정도가 아니지. 자네들 보기 드문 인재들이구먼. 혹시 계속 일해볼 생각은 없나?”

톰이 또다시 이글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토비와 레이나에게 물었다.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저희는 꼭 만나야 할 분이 있어서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어요.”

레이나가 겸연쩍게 웃으며 톰의 제안을 사양했다. 톰은 아직도 미련이 남은 듯 재차 물어왔다.

“뭔가 급한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네만, 자네들 지금 가진 돈도 잃어버렸다고 했고 머물 곳도 없으니 몇 달간이라도 일해보는 게 어떻겠나? 보수는 두둑이 줌세.”

레이나는 톰의 말에 잠시 잊고 있었던 도둑맞은 것들이 퍼뜩 떠올랐다. 그녀의 허리춤에 묶인 주머니는 밑 부분의 가죽이 날카로운 무언가로 잘려 너덜거리고 있었다. 분명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내용물을 훔치기 위해서 주머니를 자른 흔적이었다.

“톰, 저희가 여기 오는 길에 아무래도 소매치기를 당한 것 같아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방법이 없을까요?”

레이나는 주머니를 들어 톰에게 보여주며 다급하게 물었다.

“음... 어디서 소매치기당한 건지 짐작 가는 부분이라도 있나?

톰이 너덜거리는 가죽을 살펴보며 말했다.

“여기 올 때, 어떤 꼬맹이 녀석이 돈을 받고 안내해준다고 해서 안내받았어요. 그리고 여기 도착해서 녀석이 약 올리면서 냅다 도망치길래 그냥 버릇이 없는 꼬맹이구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소매치기였던 것 같아요.”

토비가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아직도 그 꼬맹이 녀석만 생각하면 화가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 아주 전형적인 수법이지. 누가 그런 수법에 당하나 했더니 자네들이었군. 보기보다 어리숙하잖아?”

톰이 기가 찬 듯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했다. 정곡을 찔린 토비와 레이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톰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아이들은 이곳, 엑스브리지의 빈민가에 사는 아이일걸세. 요새 세상이 참 무서워졌어. 아무리 빈민가라고 해도 예전엔 도리라는 걸 지키면서 살았는데, 최근에는 애들까지 앞세워서 자네들 같은 모험가들한테 사기를 치고 말이야. 돈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니까?”

“빈민가로 가서 훔쳐 간 것을 돌려달라고 말해보면 안 될까요?”

레이나가 순진한 얼굴로 톰에게 물어봤다. 톰은 레이나의 세상 물정 모르는 듯한 질문에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이 바보야! 도둑들한테 가서 우리 돈 돌려달라고 하면 ‘그럼요! 당연히 돌려드려야죠!’ 하면서 퍽이나 주겠다!”

토비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레이나를 다그쳤다.

“좀 빈정대긴 했지만, 이번엔 이 친구 말이 맞네. 앞에 말했다시피 빈민가 주변이 부쩍 위험해졌어. 괜히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이 강도당한 사건들도 많고, 뒤를 봐주는 범죄조직이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조금 속이 쓰리겠지만, 돈은 없어진 셈 치고 단념하는 게 좋을걸세. 괜히 되찾으려다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네.”

톰이 차분한 말투로 레이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레이나의 눈빛은 흐트러짐 없이 단호했다.

“저도 단순히 돈을 잃어버린 거라면 그럴 거예요. 하지만 제게 중요한 소개장도 함께 도둑맞았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야만 해요.”

레이나가 결연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소개장이라면 시간이야 조금 걸리겠지만 다시 써달라고 하면 되지 않는가? 굳이 그런 위험까지 감수할 필요가 있겠나?”

톰이 의아한 말투로 말했다. 톰의 말에 레이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대답했다.

“제게 소개장을 써주신 분이 그러셨어요. 제가 찾아가야 할 분은 세상으로부터 숨어서 활동하시는 분이라 되도록 다른 사람에게 위치를 노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실 거라고. 특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빼고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첫날부터 이런 일이.”

레이나가 잔뜩 우울감에 젖은 말투로 이야기했다. 말하는 도중 레이나는 노발대발하는 베로스의 얼굴이 떠올라 그만 아찔해졌다. 레이나는 베로스의 잔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으며 톰에게 강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꼭 되찾아야만 해요! 제게 빈민가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톰은 레이나의 결연한 태도에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무래도 단념할 기색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좋네. 자네의 의지 잘 알겠네. 대신 조건이 있네.”

톰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 나갔다.

“첫 번째는 지금 당장 가겠다는 말은 하지 말게. 아무리 그래도 밤에 그곳에 가겠다는 건 미친 짓이야. 내일 아침에 경비대에게 빈민가 부근에서 모험가의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싶지는 않네. 오늘은 일단 충분히 쉬고 내일 출발하시게.”

토비는 톰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톰이 한 무시무시한 말에 주변 공기가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톰은 긴장감을 조성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두 번째는 자네가 오늘 만들었던 메뉴들 말일세. 그걸 내게도 가르쳐주게. 우리 식당의 신메뉴로 사용하고 싶네. 이 조건을 들어준다면 나도 조금 도움을 주지.”

“첫 번째 조건하고 너무 온도 차가 나잖아요!”

토비가 맥이 풀린 말투로 톰에게 핀잔을 줬다. 그러나 톰이 험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금세 먼 산을 바라보는 척을 했다. 톰은 다시 레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이건 요리사로서 당연한 제안일세. 요리사에게 자기 요리는 자식과도 같지. 오늘 만든 요리들은 정말로 훌륭했네. 나 혼자였다면 오늘 온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 없었겠지. 아무 말 없이 자네의 요리를 내 요리인 것처럼 사용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그래서 정식으로 제안하는 것일세.”

“그럼요! 당연하죠. 톰 씨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오히려 기뻐요. 마음껏 사용해주세요.”

레이나는 기쁜 표정으로 톰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톰도 그녀의 말에 응답하듯 고개를 끄덕했다.

“좋네. 오늘 밤은 너무 늦었으니 일단 우리 여관에서 하루 묵게. 묵을 방은 여기 그림즈비가 해결해 줄걸세. 그렇지 않나, 그림즈비?”

톰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여관 주인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뭐. 그... 그렇게 함세.”

여관 주인이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토비와 레이나는 속으로 저 표정으로 말하면 아무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아. 내일 아침 눈을 뜨는 대로 나와 함께 빈민가로 가봄세.”

“뭐라고? 자네가 거길 왜 같이 가!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위험하네.”

여관 주인이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톰은 태연한 표정으로 여관 주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 얼굴을 보게. 적어도 쉽게 해치려고 들지는 않을 걸세. 게다가 빈민가 녀석들 배고플 때 내가 몇 번 밥을 먹여 돌려보낸 적이 있지.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은혜를 원수로 갚지는 않을거라 믿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늘 처음 본 녀석들을 위해 왜 그렇게 까지 하는겐가?”

“이 친구들 덕분에 우리도 오늘 최고의 날을 보내지 않았나. 밥값 이상을 충분히 했으니 나도 보답하고 싶네.”

톰은 진지한 말투로 여관 주인에게 대답하고는 레이나와 토비를 향해 말했다.

“자네들은 오늘 충분히 쉬어두게.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출발하지.”

레이나와 토비는 톰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불타는 모루에서의 하루가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