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정말로 못 들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을 해주기로 했다.


"우리 그만 만나자!"

"하아!"


뭘 그렇게 과하게 열을 낼까?

꼭 손으로 부채질을 해대야 할까?

자기도 사실 내가 정말로 좋아서 사귄 건 아니면서.

.
.
.

효주, 그러니까 내가 헤어지자고 말한 '아직은 여자친구'.

얘는 초등학교 동창이고 나랑 같은 학원에 다니고 있어.


초딩 때도 딱히 친한 것도 아니고

그냥그냥 나름 사이좋게 지내던 사이랄까?


지금 다니는 학원에서 다시 만나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랬어.


"어? 너, 호진이?"

"어? 넌, 효주?"

"나 기억하네? 반갑다, 야."

"어, 그래. 반갑다."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공부 꽤 하나봐?"

"그냥 운이 좋았어. 근데 넌 왜 여학교야?"


마침 서로 교복차림이어서 알아보기가 더 쉬웠지.


"아빠가 남녀공학은 죽어도 안 된다잖아."

"아, 그래?"

"응."

"......."


이제 무슨 말을 하지?

어색어색.......


뭐, 이정도 사이?


그래도 심하게 어색하진 않았어.

효주란 애가 원체 밝고 명랑한 캐릭터거든.

성격도 좋고.


키는 162? 163?

165는 안 되는 건 확실해.


공부하기보다는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걸 더 좋아하고,

수다떠는 걸 좋아하고,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얘는 딱 '여고생이다'라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 만큼 제법 예쁜 편이고,

참 귀여운 상이야.




어쨌든!

다시 만나고나서 며칠 후인가,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효주가 먼저 말을 걸었었어.


"호진아!?"

"어."

"너네 너무 티내는 거 아냐? 수업 중에도 옆구리 콕콕. ㅋㅋㅋㅋㅋㅋ"

"말도 마라. 아주, 짜증나 죽겠다, 저 계집애."

"에에~이~! 좋으면서 그런다."

"야, 너 지금 내 진심어린 짜증을 의심하는 거냐? 하아~"

"피이~! ......근데 언제부터 사귄 거야? 우음, 초등학교 때부터......"

"사귀긴 개뿔! 저런 사이보그랑 누가 사귀겠냐? 아침부터 자기 전까지 잔소리, 잔소리! 하아~!"

"맞아, 맞아! 너, 쟤랑 같이 산다고 했지? 나도 들은 적 있어."

"아, ㅅㅂ 여기까지 퍼졌냐?"

"진짜야?"

"어."

"근데 안 사귀어?"

"안. 사. 귄. 다!"

"왜? 둘이 잘 어울리는데."

"야, 됐다. 고마해라. 짐 쟤 땜에 짜증 지대로그등?"

"쿡. 그래. 시원한 거라도 마시고 열 좀 식혀."



이런 얘기를 주고 받았던 적이 있어.

초등학교 때는 잘 몰랐는데,

몇 번 얘기 나눠보니까 엄청 편하더라, 효주란 애.


윤아 때문에 가끔 숨이 막힐 듯 답답할 때,

학원에 효주가 있는 게 참 다행이지 싶었어.

주로 하는 얘기는 시시콜콜한 잡담이 전부였지만.


그렇게 초딩 때보다 조금 더 친해진 친구 정도로 지내다

지난 달에 내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

얘기하다보니 작년 크리스마스, 연말을 효주나 나나 너무 허무하게 보내버린 거야.

그래서 어쩌다보니


"너는 왜 남자친구 하나 못 만드냐?"

"지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넌 윤아 때문에?"

"여기서 윤아 얘기가 왜 나오냐? 걔가 무슨 상관이라고."

"왜? 가만보면 은근 눈치보는 거 같던데?"

"내가 언제? 전 여자친구랑 크리스마스 전에 헤어져서 그렇지, 나 여태까지 여자친구 잘만 사귀었거든?"

"그런가?"

"그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둥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왜?"

"여기저기 찝적대잖아? 그래서 크리스마스 전에도 까인 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거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쪽팔리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됐고, 암튼 난, 양다리 같은 건 안 해."

"양다리 아니고 문어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참나. 흐느적대니까 좋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안 했거든? 웃겨, 정말."

"암튼 난 바람둥인 아냐!"

"흥~!"

"그럼 나랑 사귀어 보든가."

"내가 왜? 미쳤니?"

"아, 그럼 바람둥이라고 하질 말든가."

"알았어. 미안!"

"됐다."

"그럼 오늘부터 1일?"


솔직히 그건 예상밖의 대답이었어.

그냥 농담 반으로 건넨 말이었고,

삐친 척한 것도 장난이었을 뿐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런 대답을 하고

내 팔을 낚아채서 팔짱을 딱 껴주니까


"1일!"


이렇게 됐던 거야.


.
.
.


"하아!"


벌써 몇 번인지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고르는 효주,

효주의 손은 쌀쌀한 날씨가 무색하게 바쁘게 움직였다.


"너, 나 이런식으로 까는 거니?"


그렁그렁한 두 눈,

그 눈에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주루룩 쏟아져내릴 것 같았다.


아! 진짜...... 쏟아져내려버렸다.


이런 반응은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 했다.

얘라면, 효주라면



"이런 바람둥이 자식! 내, 너 그럴 줄 알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냐?"

"그래, 이 개자식아! 넌 뒤짐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식으로 달려들 가능성이 꽤 높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애들이 그랬던 것처럼 화를 내고 욕을 퍼붓는 정도?

그정도까진 예상했었다.


이런 반응은...... 예상도 못 했단 말이다.



"나한테 왜 사귀자고 했어?"


아, ㅆㅂ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대답은커녕 똑바로 응시하는 효주의 두 눈을

마주볼 수조차 없었다.



"넌 처음부터 장난이었니? 난 아무 것도 아니었어?"



그럼......


넌.......


진심....... 진심이었구나.



맑은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투명하게 빛나는 눈물 방울들.

보석처럼 빛나는 그 눈물방울처럼 네 마음 넌 소중하게 간직했던 거구나.


전혀 몰랐어.


전혀......


미안하다.


미안.......



"처음부터 넌 장난이었던 거야? 그런 거야?"



한 마디라도 할 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미안하단 말을 반복하고 있어도

입으로 나오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할 수가 없다.



"그럼 왜 그 때 그랬어?"


그 때?


"처음에, 나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왜 그렇게 말했어? 나 하는 거 봐서 조금씩 좋아해준다고....... 그런 말 안 했으면 나도 그냥....... 나도 그냥 장난으로 넘길 생각이었단 말이야! ....... 근데 왜 그랬어?"


아...... 그 때.......


그 때, 그랬었다.

.
.
.


"근데 호진아! 나 좋아해?"

"어?"

"좋아하니까 사귀자고 하는 거 아냐?"

"스으~~~~ 헤에~~"

"뭐야, 그 표정은? 설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귀자고 했던 거야?"

"음......"

"진~짜 순 바람둥이네, 이 거!"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

"그냥 좋은 여자애구나 싶어서......"

"아, 그러셔?"

"야, '좋. 은. 여. 자.', 라는데 뭘 계속 째려봐?"

"내 맘이거든? 그래서 좋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지금부터 조금씩 좋아해보려고. 너 하는 거 봐서."

"아~! 그래서 지금은 '그저 그렇다', 라는 거지?"

"어! 정답!"

"와! 이게 죽을라고! 너, 이게 1일 선언한 여친한테 할 소리야? 지금 확 채여볼래?"

"뭐야, 그 발차기? 짐 남친 앞에서 귀여운 척하는 거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ㅆㅂ, 겁나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만 웃고! ......그래! 솔직해서 봐준다! 그거면 됐어."

"어허! 어디 남친님의 등짝을!"

"왜? 옆구리로 해줄걸 그랬어?"

"음...... 아니! 꼬집는 건 사양!"

.
.
.


그 땐 그냥.......

적당히 둘러댔던 것뿐인데......


하아! 그걸 내 진심이라고 생각했던 거구나!

별 생각없이 지껄인 그 말을.


미치겠네, 진짜!



"야! 김호진!"

".......어."

"넌 내가 그렇게 만만하니? 아무 것도 아니니?"

"........"

"나 하는 거 봐서 좋아해 준댔잖아! 그래서 나 노력했어. 너 만날 때마다, 그리고 오늘도 정말 많이 노력했어! 너 기분 안 좋아보여서 그거 풀어줄려고...... 나 많이 노력했단 말이야. 근데 나한테 왜 그래? 왜 그러는 건데?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에!"


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죄인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내가 그렇게 많이 부족하니?"


아니. 그건 아니다.

효준 좋은 친구고 좋은 여자다.

오히려 나한텐 과분하다면 모를까.


단지...... 내 마음 속에 윤아가 너무 크게 자리 잡아

누구도 들어올 틈이 없을 뿐이다.


그래서 겨우, 겨우 고개를 흔들어 아니란 의사를 전해봤다.


"그럼 싫은 거야?"


물론 싫은 것도 아니다.

좋은 애인데 싫을 리가 없다.


또 고개를 저었다.


"윤아...... 때문이구나....... 역시."


갑자기 윤아 이름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효주를 바라봤다.


"윤아는 아무 상......."


촥!


절묘한 스파이크 어택이 내 뺨다귀에 작렬했다.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어 주위엔 제법 보는 눈들도 많은데.......


ㅈㄴ 쪽팔려, ㅅㅂ ㅠㅠㅠㅠㅠㅠ


쪽팔린 것도 쪽팔린 거지만 순간적으로 열이 확 오르는 거다.

내가 잘못했건 어쨌건.


근데 돌아간 고개를 재빨리 훽, 제자리로 돌려 효주를 보니

순식간에 꼭지를 뚫을 듯 올랐던 열이 또 순식간에 증발해버린다.



"나쁜....... 자식...... 넌 진짜....... 진짜....... 나쁜 자식이야."



울음 섞여 발음도 불분명했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지. .......나도 다 알고 있었어. 그래도 그냥....... 모른 척......."



그래. 지금부터라도 아무 말도 하지 말자.

꼭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냐고! 왜?!"



그러게나 말이다......



"손은 왜 잡아줬던 거야!"



네가 손이 시렵다고 하니까......



"왜 안아줬던 거야!"



춥다고 하니까.......



"왜 점점 기대하게 만든 거냐고! .......왜 날 이렇게 바보로 만든 거냐고! 왜?!"



그러니까.......


나도 내가 왜 그랬나 모르겠다.


그래서 더......


미안.


사실 난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다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그걸 몰랐다.



나, 진짜 멍충인가보다. ㅅㅂ



눈앞에, 이제는 쪼그려 앉아 엉엉 소리내어 우는 효주를

난 위로해줄 수조차 없다.


내가 이런 상황을 만들어버렸으니까.


나도 모르게 효주를 향해 내민 손을

더 뻗지도, 그렇다고 원래 있던 호주머니로 돌리지도 못 한 채

그저 엉거주춤 서서 굳은 석상처럼 효주가 진정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나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보다 답답한 게 또 있을까.



1초가 1년처럼,

내 곁으로 억겁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초리에

내 온몸이 난자되어 조각조각 흩어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난 그자리에서 꼼짝을 할 수가 없다.

숨을 어떻게 쉬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가!"



드디어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린 쪼그려 앉은 채인 효주로부터 들려왔다.



"가버려! 그 기집애한테! .......잘난 그 기집애한테 가라고! 빨리 꺼지라고!"



사실은 애초엔 그러려고 했었다. 애초엔.


그런데,

내가 지금 이 앨 두고 가도 될까?



"난 죽어도 둘이 잘 되라곤 안 할 거야! 죽어도! 너네 둘도 아팠으면 좋겠어. 내가 지금 아픈 것보다...... 더 아팠으면 좋겠어. 왜 둘 사이에 날 끼워? ......왜 나만 이렇게 아프게 만들어?"



그건 전적으로 내가 잘못한 건데......

윤아까지 뭐라고 할 건 없......


그냥 다 내탓인데.......



"빨리 가! 가란 말 안 들려? 설마 지금 내 걱정하고 있는 거니? 이제와서? 누구 때문인데?"



그래, 걱정도 하면 안 되는 거였구나.



"빨리 가라고! 없어지라고! 제발! 그래야...... 나도 내 갈 길 갈 수 있으니까...... 제발 꺼지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 무슨 마음으로 효주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남자인 난, 죽었다 깨나도 모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하나 알겠는 건,

'제발 가!', 란 말이 진심이고 간절히 그러길 바라고 있다는 것 정도.



안녕.


이 말은 해도 될까?


모르겠다.

해선 안 될 것도 같다.

그래서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전철역으로 걸어가면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한 가지 죄와 그에 대한 벌.



다른 사람의 소중한 마음을 함부로, 또 가볍게 여긴 죄.

때문에 그저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벌.



참으로 무거운 죄인 것 같다.

참으로 무거운 형벌인 것 같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여태껏 난.......



난 어쩌면 좋을까, 윤아야?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내가 너무 초라하다.



이런 내가 널 좋아해.

그래도 되는 걸까?


안 된다는 말을 듣더라도

난 네가 좋아.

윤아야.


네가 보고 싶다.



................ 여기까지. 다음에 계속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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